2천년전 삼국지 시절
위촉오를 정복한 진나라는 얼마 안가 사치로 타락해버렸고
나라는 분열되어 그 틈을타 사방에서 이민족들이 진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들 알다시피 이시절을 오호십육국 시대라고 말한다.
이 오호 십육국 시절 독특한 역사기록을 가진자가 있는데
바로 석륵이다.
석륵은 후조의 창시자이고 흉노족의 소속의 갈족으로
큰코에 눈이 깊고 수염이 많다고 기록된다.
중국 역사서에는 갈족을 호갈(胡羯)이라고 부르는데
호인은(胡人)은 한족들이 옛날부터 서역의 토하라 백인들을 부르던 칭호다.
(푸른눈의 몽골 여성)
고고학자들의 유전자 검사로 몽골 서부의 호드긴 톨고이의 지역에
백인으로 추정되는 장군의 묘가 출토되는등
흉노는 당시 다인종 유목 연합집단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전쟁떄나 추수때만 되면 종족이 연합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약탈을 했다고 한다.
1777년 조선 문견잡기의 몽골인의 용모에 대한 기록이다.
이때만해도 동양 서양인 혼혈이 아직 많이 살았다.
중국은 땅덩어리가 크고 그곳에 전부 중국인이 산다고 착각을 한다.
심지어 삼국지같은 게임이나 역사서에 전부 동양인처럼 묘사해서
중국이 5천년전부터 동양인만살던 지역이라고 착각을한다.
하지만 사실 중국 한족들의 영역은 5천년간 딱 이범위정도였다.
역사책보면 당나라가 크고
청나라 땅덩어리가 어마어마한데
그런데 저기에 한족이 퍼져산것이 아니다.
위구르 몽골을 강제 식민지화시켰지 한족들은 저기에 살지 않았다
청나라 지배기간 위구르 몽골에서 엄청나게 많은 반란이 일어났다.
(명나라 시대 영토)
이것이 한족들이 영역 범위다.
다들 알다시피 중화사상에 취한 한족들은 미개한 오랑캐들이 산다고 여겨서
군사목적을 제외하고는 저 밖으로 생활 영역을 넘어가지 않았다.
한족들은 청나라 시절가서 그나마 만주에서 살기 시작했고
한족들의 티베트 위구르의 대량 이주는 불과 30년도 안되었다.
이것도 그들의 독립을 두려워해서 매우 최근에 만든 정책이다
석륵은 본래 성씨도 없을정도로 미천한 자였다. 역사학자들은 이 석씨도 어디서 아무렇게나 자기가
한족들처럼 지은것이라 추정한다. 왜냐면 그당시 한족들이 그들보다 훨씬 발전된 문화를 지녔기 때문이다.
석륵은 노비신분으로 어릴적부터 낙양에서 장사를 했는데 진나라 반군세력에 참여해서 점점 세력을 불렸다고 한다
석륵은 점점 승승장구해서 낙양을 점령하고
진나라 사마씨들을 능욕하고 후조를 세워 한족들을 다스리기 시작한다.
그 동생 석호(石虎)는 더욱 더 잔혹하고 신의가 없어서,
석륵은 그런 석호를 죽이려고 하다가 그 어머니의 만류로 그만둔 적이 있었다.
석호는 잔혹한 데다가 시기심도 강해서, 군중(軍中)에서 자기처럼 기골이 장대한 자가 있으면, 사냥하다가 활로 쏘아 죽였다고 한다.
석호는 석륵이 병들어 죽은 다음 태자를 제외한 석륵의 모든 자손들을 숙청하고는 태자를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었다.
허수아비 황제는 스스로 양위할 뜻을 비쳤고, 그러자 석호는 처음에는 사양하는 척하다가 신하들이 모두 황제가 되어 달라고 하니, 황제를 폐위하고 자신이 스스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양위하려 한 이전의 황제도 결국에는 암살당했다.
석호가 처음에 태자로 세운 아들은 곧 반란을 일으켜서 그 아비를 죽이고 자신이 바로 황제가 되려 했기 때문에 석호가 먼저 태자와 그 자손들을 모두 잔혹하게 죽였고, 그 다음에 태자로 삼은 석선(石宣)은 그 아비인 석호가 가장 총애하는 왕자를 죽였기 때문에 석호는 이번에도 자신의 아들 석선과 그 석선의 아이들을 모두 잔혹하게 죽인다.
그러한 권력투쟁 과정에서 석호 자신이 총애하던 왕자와 손자도 모두 죽게 되니, 석호는 충격 속에 병에 걸려 죽어갔다.
결국 석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석세(石世)는 석호가 전조(前趙)를 멸망시킬 때 포로로 잡은, 그 당시 12살이었던 전조의 공주의 어린 아들이었다.
'후조'의 건국자인 석륵의 포로 중에 아직 소년이었던 '염첨(冉瞻)'이라는 한족(漢族) 소년이 있었다.
그 용맹함을 높이 사서 석륵은 자신의 동생 석호(石虎)에게 염첨을 양자로 삼게 했고, 그 염첨의 아들이 '석민(石閔)' 즉 훗날 스스로 그 옛 성을 되찾아 '염민(冉閔)'이라 하게 되는 자다.
따라서 '염민(석민)'은 석호의 양손(養孫)이 되지만, 실제로는 한족 혈통의 무인(武人)이었다.
불교를 좋아했던 석륵은 한족을 무조건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들의 황제도 되고자 하는 마음도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한인(漢人) 사대부들 중에서 인재들을 모아 '군자영(君子營)'이라는 것을 만들게 했고, 그들을 중용했다.
석륵에 의해 보존된 한족의 문화, 그리고 석륵과 석호 모두 병사로 쓰기 위해 그 숫자가 많았던 한족 장정들을 징병했던 것이, 훗날 한족들이 '염민(석민)'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만났을 때 대반격에 나설 수 있게 한 기초가 된 것 같다.
'석민(염민)'은 그 아버지처럼 용맹했고, 처음에는 갈족의 용사로서 모든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렇게 해서 석민은 새로 갈족의 지배자가 된 석호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갈족의 후조에서 강력한 실권을 갖게 된다.
그러다가 석호가 죽고 그 후손들 간에 잔혹한 권력투쟁이 일어났을 때, 처음에는 자기를 도와주면 석민(염민)을 다음의 황제로 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석준(石遵)'이 막상 황제가 되자 배신하여 오히려 석민(염민)을 죽이려 하니, 이때부터 석민(염민)은 갈족 정권과 등을 돌리기 시작하게 된다.
결국 석민(염민)은 석감을 유폐하고 자신이 직접 정권을 장악하면서, 한족들을 선동하여 모든 갈족들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것을 '살호령(殺胡令)'이라고 한다(石閔下殺胡令).
석민(그 직후 자신의 이름을 다시 옛 성을 되찾아 '염민'이라고 고친다.)은 '호갈(胡羯)', 즉 오랑캐 갈족이 자신의 명에 따라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 살호령에 따라, 염민이 직접 조나라 사람들을 이끌고 갈족 20만명을 죽였는데, 남녀노소, 그 귀천을 가리지 않고 죽였으며, 그 시체들은 성문 밖에 던져 놓아 들개들이 뜯어먹도록 했다고 한다.
이때 '코가 높고 수염이 많은' 것을 그 갈족의 모습으로 보고, 그런 생김새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던 것으로 보인다. 갈족이 아닌데도 갈족으로 오해되어 죽게 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염민은 그 이후 갈족의 잔당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양쯔강 이남에 있던 한족의 동진에 사람을 보내서, "오랑캐가 중원을 어지럽혔다. 이제 내가 그것을 베려 하니, 같이 토벌할 자가 있으면 보내 달라."고 하였으나, 동진의 조정에서는 답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고립무원으로 혼자서 싸워야 했던 염민은 크게 고전하기도 했으나, 결국 갈족의 후조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혼란한 틈을 타 공격해 온 모용(慕容) 선비족의 나라 '전연(前燕)'에게 크게 패배하여 염민은 포로가 되었다가 곧 살해되었다.
(우측 고구려인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금발 서역인들)
그 이후 갈족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는데,
그때 당시 20만명이면 엄청 나게 많은 숫자인데 이 이후로부터 백인계통의 흉노의 영향력은 외몽고에서 크게 줄어든다.
결국 피부색과 생김새때문에 차별되어서 씨가 말렸다
이때 안망했더라도 한족들의 인해전술을 견디기 힘들었을것이다.
석륵의 동생 석호도 심심하면 한족을 잡아 죽였다고 하는데
아마 한족들에게 억압받았던 어린시절로 인해 원한이 생긴것이 아닐까 싶다.
갈족이 동양인이었으면 멸절되지도 않았고 아마 노예로 팔렸을것이고
석호도 이런 인종차별로 한족에게 증오심이 생긴것 아닐까 싶다.
결국 이런 인종갈등은 인종 대학살극으로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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