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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중인 우크라이나 출신 이민자에서 프로그래밍으로 재산 11조 원의 부자가 된 남자

it관리 주식 코인 돈관리 2022. 3. 28. 19:46



 

 

 

1. 우크라이나에서 가난한 부모의 아들로 출생

 

얀 쿰 (Jan Koum) 은 1976년 2월 24일, 당시 소련의 구성국이었던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건설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주부였는데, 집이 가난해서 수도에서 온수가 나온 적이 없다고 한다.

 

당시 소련의 압제는 일반 가정의 전화를 수시로 도청할 정도였는데, 이 때문에 얀 쿰도 전화로 친구들과 오랜 시간 수다를 떨지 못 했다고 한다. 게다가 얀 쿰의 가족은 유대계였기 때문에 유대인에 대한 차별도 심했다.

 

얀 쿰의 가족은 가난과 정부의 감시,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피해 미국으로 떠날 계획을 세우게 되고, 그는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16살의 나이에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간다. 

 

이때 얀 쿰의 어머니는 가방 가득 연필과 공책을 챙겼다고 한다. 얀 쿰이 미국에서 학용품을 구매할 돈이 없더라도 공부를 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합류할 계획이었지만 모종의 사유로 우크라이나를 떠나지 못 했다. 그는 미국으로 떠난 가족과 계속 연락은 유지했지만, 결국 가족을 만나지 못 한 채 1997년에 우크라이나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2. 미국에서 프로그래밍을 처음 접하다.

 

미국에서도 얀 쿰 모자의 생활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아기를 돌보는 보모로 일했고, 얀 쿰은 고등학교에 다니며 식품 매장에서 청소부로 일해야 했다.

 

그런데 이 때 얀 쿰의 일생에서 일대 전환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특히 네트워크 관리를 접하게 된 것이다.

 

얀 쿰은 프로그래밍에 흥미를 느꼈지만 돈이 없어서 정규 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다. 

 

결국 헌책방에서 싼 값에 중고 교재를 사서 깨끗하게 공부한 뒤, 다시 그 책을 내다 파는 식으로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공부한다.

 

그렇게 공부한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산 호세 대학교(San Jose University) 의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한다.

 

 

 

3. 프로그래머로서 성장하다.

 

대학생이 된 얀 쿰은 프로그래밍 능력을 인정받아 세계적인 회계법인인 언스트앤영(Earnst & Young) 의 보안 담당자로 야간에 일하게 된다. 

 

이 때 얀 쿰의 인생에 또 한 번의 중요한 시기가 찾아오는데, 바로 평생의 친구 브라이언 액튼(Brian Acton) 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사진의 인물이 브라이언 액튼이다.)

 

 

 

 

 

 

브라이언 액튼은 전형적인 미국의 중산층 가정 출신 백인으로서, 펜실베니아 대학교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가 다시 스탠퍼드 대학교의 컴퓨터 공학과로 옮겼을 정도로 공부도 잘했다. 당시 브라이언 액튼은 세계적인 인터넷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던 야후(Yahoo)에 사번 44번으로 입사한 직원이었다.

 

두 사람은 사회생활에서 흔히 오가는 이리 저리 빙빙 둘러대는 사교적 대화에는 관심이 없었고, 실질적이고 직설적인 내용의 대화를 나누면서 급격히 가까워졌다고 한다.

 

얀 쿰은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 둘 다 개소리하는 데는 능력이 없었어요(Neither of us has an ability to bulls**t). "

 

브라이언 액튼과 얀 쿰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얀 쿰은 브라이언 액튼의 집에 놀러가 그의 어머니가 해주시는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처음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얀 쿰과 브라이언 액튼은 당시에 원반 던지기 놀이인 프리스비 (Frisbee) , 축구, 그리고 스키를 함께 즐겼다고 한다.

 

얀 쿰은 언스트앤영을 떠나 친구 브라이언 액튼이 일하고 있던 야후(Yahoo!) 로 이직한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2000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얀 쿰은 이제 가장 친한 친구인 브라이언 액튼 외에는 기댈 곳이 없어졌다.

 

 

 

 




(프리스비는 이런 원반을 던지고 노는 게임이다)

 

 

 

 

4. 대학교를 중퇴하고 본격적으로 직장인이 되다.

 

얀 쿰은 야후로 옮겨 IT 인프라 엔지니어로 일하면서도 낮에는 계속해서 산 호세 대학교에서 수업을 들었는데, 당시 야후의 서버 중 하나가 일시 마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야후의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이었던 데이비드 파일로(David Filo) 가 얀 쿰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서 서버가 이 지경인데 너는 뭐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얀 쿰이 "저 수업 듣는 중인데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데이비드 파일로는 어처구니가 없어 "당장 사무실로 튀어 와"라고 명령했고, 어차피 대학교 수업에 흥미도 느끼지 못 했던 얀 쿰은 학교를 그만 두고 본격적으로 전업 직장인의 길로 들어선다.

 

 

 

5. 야후에서 9년을 일하고 퇴사하다

 

얀 쿰은 야후에 1998년에 입사해 2007년에 퇴사한다.

 

이 9년의 기간 동안 다양한 일을 경험하게 되는데, 특히 웹사이트 광고 관리자로 일하면서 상당히 큰 좌절감을 느꼈다고 한다. 얀 쿰이 보기에 광고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제품을 개선하는 것도 아니고, 사용자의 삶이 더 나아지도록 돕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겉치레에 불과했다.

 

야후에서 일하면서 연봉을 많이 받아 재정적으로는 어느 정도 안정되었지만, 얀 쿰은 이 길이 자신의 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국 얀 쿰은 브라이언 액튼과 함께 2007년 9월, 야후를 퇴사하고 휴식기를 갖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두 사람은 남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프리스비 게임을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얀 쿰은 IT 업계의 신성으로 떠오르고 있던 페이스북(Facebook) 에 지원해 불합격하기도 했다.

 

 

 

6. 아이폰을 구입하고 왓츠앱을 설립하다

 

그렇게 저축한 돈을 가지고 백수로 지내던 2009년 1월, 얀 쿰은 아이폰을 구매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처음으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의 세계에 입문한다.

 

얀 쿰이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운동을 마치고 사물함에 넣어놨던 아이폰을 꺼내 보니 그를 찾는 친구들의 부재 중 전화가 수십통 있었다고 한다.

 

얀 쿰은 이걸 보고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스마트폰에서도 상대방의 부재 중 상태를 알 수 있게 하면 어떨까?"

 

당시 얀 쿰은 소련계 미국 이민자들의 주간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브라이언 액튼을 데리고 이 모임에 가서 진지하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다만 얀 쿰은 아이폰 앱 개발 프로그래밍을 하는 법은 몰랐다. 그래서 모임의 수장이던 알렉스 피시먼(Alex Fishman) 이 프로그래머 구인 웹사이트에서 러시아 출신 아이폰 앱 개발자인 이고르 솔로메니코프(Igor Solomennikov) 를 소개해 준다.

 

이렇게 지원을 확보한 얀 쿰은 2009년 2월, 캘리포니아에서 회사 "왓츠앱(WhatsApp)'을 설립하고는 회사와 똑같은 이름의 앱을 빠른 속도로 출시한다.

 

미국에서 일상적인 인사로 쓰이는 왓츠업(What's up) 과 발음도 비슷하고, '앱(App)' 이라는 단어도 들어가 있는 작명이었다.

 

 

 




(왓츠앱 로고)

 

 

 

 

7. 왓츠앱을 성장시키다

 

왓츠앱의 출발은 미미했다. 알렉스 피시먼과 러시아계 이민자들이 다운로드 받아서 쓰는 것 외에 일반 사용자는 거의 없었다. 피시먼은 얀 쿰을 식당에서 만나 앱의 문제점들을 하나 하나 짚어주었고, 얀 쿰은 노트에 받아 적어 개선에 활용했다.

 

이 때 얀 쿰이 사용한 노트는 미국으로 이민을 올 때 어머니가 가방에 잔뜩 챙겼던, 소련 정부에서 지원품으로 나눠 주었던 바로 그 노트였다고 한다.

 

그런데 사용자가 몇 달째 거의 늘어나지 않아서, 얀 쿰은 사업을 그만두고 다시 취업을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이 때 브라이언 액튼이 절대 그만두지 말고 계속해야 한다고 말렸다고 한다.

 

(이 와중에도 두 사람은 프리스비를 즐겼다고 하는데, 어지간히 이 놀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때 브라이언 액튼은 왓츠앱에 공식적으로 합류하지 않은 백수 시절이었는데,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지원했다가 불합격한다.

 

브라이언 액튼의 트위터에는 당시에 적었던 트윗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2009년 5월 23일에는 이렇게 썼다.

 

"트위터 본사에 불합격했다. 잘됐다. 그렇게 먼 거리를 통근할 뻔했네. (Got denied by Twitter HQ. That's ok. Would have been a long commute)."

 

 

2009년 8월 3일에는 이런 트윗도 남겼다.

 

"페이스북에 불합격했어. 환상적인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멋진 기회였는데. 인생의 다음 모험을 기다려야겠다. (Facebook turned me down. It was a great opportunity to connect with some fantastic people. Looking forward to life's next adventure.)"

 

 

 

그리고 2009년 6월, 왓츠앱에 기회가 찾아왔다. 애플이 아이폰에 '푸쉬 알람' 기능을 추가한 것이다. 지금은 푸쉬 알람 기능이 스마트폰에 일반화되어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것은 신기술이었다.

 

왓츠앱은 여기서 사용자가 자신의 상태를 업데이트할 경우 푸쉬 알람을 통해 지인들에게 그 상태를 알려주는 기능을 만든다. 사용자들이 지인들의 목록에서 각각의 상태를 일일이 훑어보지 않아도 알람을 통해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왓츠앱의 초기 사용자들이던 소련계 이민자들은 이 기능을 메시지 전달 용도로 사용하게 된다. 예를 들어, 단순히 자신이 부재 중이어서 스마트폰을 확인할 수 없음을 알리는 상태 공지뿐만 아니라, 간단한 인삿말 등을 푸쉬 알람을 통해 전하는 것이다.

 

오늘날 카카오톡 등과 같은 무료 메시징 앱(messaging app) 의 초기 형태가 등장한 것이다.

 

당시에는 스마트폰으로 이런 무료 메시징 앱 기능을 구현한 것은 블랙베리(BlackBerry) 스마트폰 밖에 없었다. 그런데 왓츠앱은 아이폰 앱으로 출발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앱 형태였기 때문에 특정한 회사의 기기에 구애되지 않았다. 

 

즉, 어떤 스마트폰을 쓰든지 간에 왓츠앱을 쓰면 메시징 앱 기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왓츠앱은 기본적으로 스마트폰의 연락처 목록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만들어 가입하는 형태도 아니었다.  전화번호만 있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앱인 것이다.

 

얀 쿰과 브라이언 액튼은 이것이 엄청난 기회임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즉시 프로그래머들을 고용했고, 당시 제대로 된 사무실도 없어서 캘리포니아의 카페를 빌려 1층에서는 두 사람이 일하고, 2층에서는 프로그래머들이 노트북으로 코딩을 했다. 

 

그리고 2009년 11월 1일, 브라이언 액튼이 야후 시절 동료 5명으로부터 투자금 25만 달러를 모집해 오면서 왓츠앱의 공동 창업자 자격으로 공식 합류하게 된다.

 

 

 

8. 왓츠앱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다

 

두 사람의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왓츠앱은 아이폰 사용자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아이폰 사용자들은 왓츠앱을 통해 안드로이드 등 다른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친구들과도 연락하고 싶어했고, 이에 따라 다양한 버전의 앱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 이메일이 얀 쿰과 브라이언 액튼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두 사람은 즉시 안드로이드, 블랙베리 등 다른 스마트폰 기기에서도 앱을 사용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머들을 추가로 고용했다.

 

이 때 합류한 얀 쿰의 친구가 블랙베리 개발자였던 크리스 파이퍼(Chris Peiffer) 인데, 당시만 해도 무료 메시징 앱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때였기 때문에 크리스 파이퍼는 왓츠앱의 성장가능성을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크리스 파이퍼는 "문자 메시지(SMS)가 있는데 뭐하러 이런 앱을 또 만든다는 거지?" 라고 물었고, 얀 쿰은 이에 대해 "문자 메시지는 이미 죽은 기술이야. 1970년대의 유산인 팩스와 같은 거라고." 하면서 설득했다고 한다.

 

그리고 크리스 파이퍼는 왓츠앱의 폭발적인 사용자 증가추이를 보고는 회사에 합류하게 된다.

 

직원 수가 늘어나면서 왓츠앱은 더 이상 카페를 전전할 수가 없어 사무실을 구하게 되는데, 생산성 앱으로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에버노트(Evernote) 가 사용하는 빌딩에 작은 사무실을 세 내어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이 사무실에 왓츠앱을 알리는 간판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초기 스타트업이 으레 그렇듯이, 왓츠업은 당시 폭발적인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수익 모델이 없어 비용을 계속 까먹고 있는 상태였다. 왓츠앱의 사업에서 가장 큰 비용지출은 새 가입자에 대한 인증 문자메시지 발송 요금이었다.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없으니 이 문자 메시지 발송 비용은 고스란히 얀 쿰이 야후 시절 받았던 월급으로 저축해 놓은 은행 예금에서 지출되었다. 사용자가 급증할 수록 이 비용도 급증했다.

 

어느 정도 사용자 수도 확보되었고, 더 이상 늘어나는 비용도 감당할 수 없었기에 마침내 출시 1년차인 2009년 12월, 왓츠앱은 앱을 1달러의 유료 다운로드로 전환한다 (이후 몇 차례 이용요금 변동을 거쳐, 2016년부터는 완전히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

 

유료 다운로드로 전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자 수가 계속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얀 쿰과 브라이언 액튼은 마침내 사업이 정상 궤도에 안착했음을 확신하게 된다.

 

 

 

 

 




(왼쪽이 브라이언 액튼, 오른쪽이 얀 쿰)

 

 

 

 

9. 사용자 수 4억 명을 달성하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왓츠앱이 성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고를 워낙 싫어했던 얀 쿰은 어떠한 홍보도 하지 않았다. 앱 화면에 광고를 받지도 않았고, 왓츠앱이 자신들을 알리는 광고도 하지 않았다. 왓츠앱은 오로지 사용자들의 입소문으로만 성장했다.

 

이에 대해 직원이 물어본 적이 있는데, 얀 쿰은 "마케팅이랑 홍보는 먼지를 털어내는 것이랑 비슷해. 일단 눈에 들어오고 나면 제품 자체에는 집중하지 않게 되니까."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왓츠앱의 성장세에 주목한 벤처 투자자들이 달려들었고, 마침내 세쿼이어 캐피탈(Sequoia Capital)의 짐 고츠(Jim Goetz) 가 8개월을 설득한 끝에 얀 쿰과 브라이언 액튼을 카페에서 만나 투자 제안을 하게 된다.

 

여기서도 두 사람은 왓츠앱에 절대로 광고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짐 고츠로부터 받아낸 뒤에야 세쿼이어 캐피탈의 8백만 달러 (한화 약 88억 원) 투자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2013년 2월, 왓츠앱의 사용자 수가 2억명, 직원 수가 50명으로 불어나면서 왓츠앱은 세쿼이어 캐피털로부터 5천만 달러 (한화 약 550억 원)를 추가로 투자받는다.

 

당시 왓츠앱의 기업가치는 약 15억 달러, 한화로 약 1조 6천억 원 정도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1년 뒤인 2014년에는 사용자 수가 4억 명을 돌파한다.

 

얀 쿰은 자신이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포르셰 자동차를 구입해 복싱 개인 레슨을 받으러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었다. (얀 쿰은 복싱을 하면서 힙합을 즐겨 듣는데, 그의 복싱 코치에 따르면 특히 칸예 웨스트를 좋아한다고 한다).

 

"나에게는 언제나 포르셰가 성공의 상징이었어요(For me, a Porsche always represented the epitome of success)."

 

 

 

10. 페이스북에 회사를 매각하다.

 

사용자 수 4억 명을 넘어선 왓츠앱의 성장세를 주목하고 있던 기업이 있었다.

 

바로 페이스북이다. 얀 쿰과 브라이언 액튼을 입사지원에서 탈락시켰던 바로 그 회사였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 는 아주 경쟁심이 강한 사람인데, 페이스북에 위협이 되는 상대가 성장하면 "인수하거나 혹은 죽여버리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페이스북이 인스타그램을 인수할 때도, 처음에 인스타그램 공동 창업자인 케빈 시스트롬이 인수 제안을 거절하자 마크 저커버그가 "회사를 넘겨주지 않으면 똑같은 회사를 키워서 인스타그램을 없애버릴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2014년 2월 9일, 마크 저커버그는 얀 쿰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 함께 저녁 식사를 나누며 왓츠앱의 인수의사를 밝힌다. 그리고 얀 쿰은 페이스북 본사를 방문해 장장 3일 내내 페이스북의 변호사들과 인수 협상을 진행한다. 

 

2014년 2월 19일, 마침내 페이스북은 193억 달러, 한화로 약 20조 원의 충격적인 금액으로 왓츠앱을 인수하게 되었음을 발표한다. IT 기업 역사상 가장 큰 인수합병 금액이었다.

 

이 금액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감이 안 오는 사람은 2012년 4월 페이스북이 인스타그램을 인수할 당시 금액이 10억 달러, 2016년 11월 삼성이 전장기업인 하만을 인수할 당시 금액이 80억 달러였다는 점을 참고하면 된다.

 

 

우크라이나 출신 가난한 이민자로 식품매장에서 청소 알바를 뛰면서 헌책방에서 중고 컴퓨터 서적을 사서 보며 공부하던 얀 쿰은, 미국으로 이민 온 지 22년 만에 전 세계적인 부자가 되었다. 그의 나이 38세 때였다.

 

 




 

(포브스 지의 표지 모델이 된 얀 쿰)

 

 

 

 

 

그러나 얀 쿰은 사업가(entrepreneur) 라는 말을 매우 싫어하는데, 사업가는 제품의 개선과 사용자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돈 버는 데만 목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얀 쿰은 2012년 5월 22일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다음에 누구라도 나를 사업가라고 부르기만 하면 내 경호원한테 얼굴을 얻어맞을 거야. 농담 아님. (Next person to call me an entrepreneur is getting punched in the face by my bodyguard. Serious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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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매각이 합의된 뒤 왼쪽부터 브라이언 액튼, 얀 쿰, 짐 고츠가 찍은 기념사진)

 

 

 

 

11. 매각 그 이후의 이야기

 

왓츠앱을 페이스북에 넘기면서 함께 합류했던 얀 쿰과 브라이언 액튼은 각각 2017년(브라이언 액튼)과 2018년(얀 쿰)에 페이스북을 퇴사한다.

 

포브스 추정에 따르면 2022년 1월 기준 얀 쿰의 재산은 약 107억 달러, 한화로 약 11조 원 정도이며 브라이언 액튼의 재산은 28억 달러, 한화로 약 3조 원 정도로 추산된다.

 

두 사람은 현재 어떤 회사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취미 생활과 자선 활동을 즐기며 화려한 백수로 지내고 있다. 브라이언 액튼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었으나, 얀 쿰은 총각이다.

 

얀 쿰은 캘리포니아의 말리부 해변에 1천억 원짜리 집을 구입한 것으로 시작으로 바로 그 옆에 870억원 짜리 두번째 집 구입, 비벌리 힐스에서는 1250억 원짜리 집을 구입하는 등 호화로운 부동산을 계속해서 사들이고 있으며, 또한 포르셰 자동차를 종류별로 수집하고 있다.

 

그러나 차림새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지, 대외 활동을 할 때는 언제나 그냥 평범한 티셔츠와 청바지, 운동화 차림으로 돌아다닌다.

 

그리고 지금도 프리스비를 즐긴다고 한다. 

 

 

현재 메타(구 페이스북)가 소유하고 있는 왓츠앱은 2022년 1월 기준으로 사용자 수 20억 명, 하루 메시지 전송 수 1천억 건을 기록하고 있다.

 

 




 

 




(얀 쿰이 가지고 있는 여러 채의 저택 중 말리부의 1천억원 집과 870억 원 집. 두 집은 나란히 붙어 있다. 미국의 갑부들은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집을 살 때 앞뒤와 옆으로 붙어 있는 집들을 함께 구입해서 아무도 집 근처에 못 오게 막는 경우가 있는데 얀 쿰도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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