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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시기 조선, 재앙적 재정 파탄의 현실 대규모 궁궐 공사와 전쟁으로 인한 파탄

누루하치 2023. 2. 22. 20:00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에 왕이 된 군주.

 

전쟁 동안 사방팔방 무너지고 박살나고, 그런 전쟁이 끝나고 하는 일은 당연히 전쟁전의 상황으로 '정상화' 하는 일이니까

 

임진왜란이 끝나고 즉위한 광해군이 할 가장 우선적인 일은 '전후복구' 였고

 

사람들이 광해군 하면 막연히 떠올리는 이미지 중에서는 '임진왜란의 전후복구를 한 왕' 같은 인상도 있음.

 

그러나 실상은....

'....광해군 대 조선은 연이은 두 차례 왜란의 영향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시기 전결 상태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국가재정은 이러한 상황을 뚜렷이 보여준다. 호조 판서 황신에 따르면 국가의 세입은 전쟁 전에 비해 2/10, 3/10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지출은 어느덧 전쟁 전의 규모를 회복하고 있었다. 한 해에 받아들이는 공물로는 당년의 용도를 지탱하기에 크게 부족했다.




또 임진왜란 이전 삼남지역의 총 전결수 113만 결은 계묘양전(선조 36년, 1603년)에서 29만 결로 줄었다가, 갑술양전(인조 12년, 1634년)에서야 89만 5,000여 결로 회복되었다. 광해군대에 중앙전부가 운용한 전결의 규모는 전쟁 전의 26%, 갑술양전의 32% 수준에 불과했다.




광해군 시기는 피폐된 국가 운영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차분히 제도적 재정비에 힘써야 할 때였다. 하지만 수많은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고 이것들 대부분은 중앙정부의 대규모 재정수요을 직접적으로 발생시켰다. 5,6개에 이르는 궁궐 공사가 한 예다. 선조 40년(1607)에 시작해서 광해군대에 완료된 창덕궁을 비롯하여 창경궁, 경덕궁, 경운궁, 인경궁, 자수궁 등의 공사가 진행되었다.



역대 조선왕조 전체를 살펴도, 이렇듯 짦은 기간에 궁궐 공사가 집중된 때가 없었다. 공사비는 대부분 전결에 부과하는 결미, 결포로 충당되었다. 납속책도 확대되었다.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中

 

'전후복구 했다는' 광해군 시기 조선 재정은 그야말로 재앙적 사태로

 

완전히 파탄난 형국.

 

예산? 완전히 바닥남.

 

세수? 전쟁을 겪은 탓에 형편없이 떨어짐.

 

그런데 지출? 이미 전쟁전의 상황을 완전히 회복하고도 남음.

 

돈 들어오는건 처참한데 지출만 말도 안되게 늘어남.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이러다 다 망한다고!" 하는 내용들

호조가 궁궐의 건축으로 인한 재정의 부족에 대해 아뢰다

호조가 아뢰기를,

“조정에 이미 궁궐을 짓는 큰 역사가 있으니 백성들이 포목을 내는 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묵은 곡식이 다 떨어져서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물은 고갈되어 조석조차도 급급합니다. 

"백성들은 먹을것도 없는데 재물도 없다. 그런데 궁궐 짓는다고 포목을 내고 있다."

 

광해 111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월 3일(기사) 6번째기사

호조에서 재정이 탕진되 선혜청의 방법으로 운영하기를 청하다

호조가 아뢰기를,【호조 참의 장세철(張世哲)의 상소를 지난 병진년 4월 4일에 특별 전교를 인하여 입계하였었는데, 정사년 1월 3일에 비로소 내리면서 점련(粘連)하여 비변사에 계하해서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판하(判下)하였다. 】

 

“영의정은 의논드리기를 ‘나라의 재정이 이때보다 더 심하게 탕진된 적이 없는데, 선혜청이 이미 성과가 있었으니, 이 상소의 내용 역시 선혜청과 마찬가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조선 역사상 지금만큼 재정이 망가진 적이 없다."

 

 

광해 44권, 3년(1611 신해 / 명 만력(萬曆) 39년) 8월 8일(을해) 1번째기사

호조 판서 황신이 재정의 고갈을 아뢰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대비할 것을 청하다

호조 판서 황신(黃愼)이 아뢰기를,

 

“신이 얼마 전의 계사에서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들어 보니 ‘구임(久任)시켜 성취를 책임지운다.’는 뜻으로 유시하셨기에, 신은 진실로 황공하고 감격스러워 죽을 곳을 모르겠습니다. 신이 삼가 나름대로 생각건대, 임명을 받은 이래 벌써 3년이 되었는데도 재주와 국량이 부족하고 일을 처리함이 생소한 까닭에 제대로 조획(措劃)하여 구원(久遠)한 규모를 마련해내지 못하고, 전후로 힘을 들인 바라고는 소소하게 보철(補綴)하여 목전의 급한 상황을 구제하는 정도에 불과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는 국가의 재정이 점차 탕갈되어 관아에 저축해 둔 것이 없고 해관(該官)은 실직(失職)한 채 단지 허명(虛名)만 남았습니다. 이미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지 못한 데다, 또 지출을 헤아려 거둬들이지도 못하므로, 비유하자면 원천이 없는 물이 당장 말라 버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이미 말라 버린 것이야 어련하겠습니까. 진실로 지금 당장 변통을 하여 국가의 큰 규모를 세우지 아니하면, 몇 년 가지 않아서 공사(公私)간에 모두 바닥이 나서 제아무리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또한 능히 그 뒤를 선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걍 지금 나라 상황은 물 마른 우물 수준인데 거기서 쥐어짜는 수준임"

 

"아니... 저축된것도 없고 세수도 좆도 안들어왔다며...

 
근데 지출이 어떻게 늘어남? 뭔 하늘에서 돈이 떨어짐?"
 
당연하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늘어난 지출을 못 맞춤.
 
그럼 어떻게 했느냐? 광해군 시기에는 조도사(調度使)라는걸 지방에 파견함.
이 조도사가 뭐냐하면 지방에 가서 사람들 돈 좀 뜯어내라고 국왕이 직접 파견한 관리들임.
조도사들은 광해군 명령으로 조선팔도로 흩어져서 할당량을 어떤 방식으로는 채워서 중앙에 올려보냄
당연한 소리지만 이 과정에서 떡고물도 챙김. 그 중에 최대 100배까지 챙긴 조도사도 있음.

 



조도사는 말 그대로 '어명' 받고 내려온 사람들이라 지방관들은 당연히 찍소리도 못함.

 

중앙에선 이런 조도사의 폐해를 지적하는 상소들이 있었지만

 

광해군은 오히려 이런 조도사들을 감싸고 듬. 본인이야 조도사가 얼마나 뒷돈 챙겨먹던 할당량만 받으면 그만이니까.

 

 


백번 양보해서 돈 많이 뜯어내는건 그렇다고 칠 수 있음.

조선은 오히려 세수를 많이 안 걷어서 만성적인 재정 부족에 시달리던 나라였으니까. 

 

일본 전국시대 농민들은 처참할 정도로 뜯겨서 비참한 삶을 보낸걸로 유명하지만, 

 

반대로 그렇게까지 뜯으려고 구석구석 개발하고 개간하고 하면서 역으로 경제력이 좋아졌다는 말도 있고,

 

또 막상 정부가 그렇게 많이 안걷는다고 해도 어차피 백성들은 중간에서 이것저것 뜯겨서 괴로운건 마찬가지니.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비정상적인 루트를 써가며 갈취한 예산이

 

무슨 창조적인 투자, 개발 행위에 쓰인게 아니라

 

걍 밑빠진 독마냥 궁궐 공사에만 정신병마냥 죄다 쳐박았다는것.

국가의 재정이 비축분도 없을 정도로 마르고, 

 

지방에서 수없이 뜯어낸 여타 자금들은 광해군의 궁궐 공사에 모조리 투입되어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지고, 

 

다시 이걸 메꾸기 위해 또 수탈이 자행, 

 

좀 고통스럽지만 세수를 많이 걷었으니 그래도 이걸로 다른 시급한 건 틀어막자- 이게 아니라

 

걍 궁궐공사에만 블랙홀마냥 쳐박고 금세 소진되고 다시 뜯어내고 반복

 

전후복구라는 차원에서 보면, 인터넷에서 언급될때마다 사상 최악의 핵폐기물처럼 언급되는 그 "인조" 가, 

 

차라리 광해군보다는 훨씬 나은 수준.

 

이게 인조가 뭘 엄청나게 잘해서? 아님. 

반대로 광해군이 한게 없다시피, 

아니 역으로 아주 씹창을 내버려서 말아먹은거 그냥 적당히 원상복귀만 시켜도

 

0보다는 1이 나은 이치마냥 더 나을 수밖에 없었음.

 

'인조는 반정한 바로 그날에 영건, 나례, 화기 등 12개 도감을 폐지하고, 조도사 6명과 제주 목사의 처형을 명했다. 이러한 조치는 어느 정도 정치적 과장이 있기는 하겠지만, 민의 고통에 대한 반정세력의 응답이라는 성격을 띠었다. 극심한 흉년으로 재정난이 예측되는 시점에 광해군의 조도성책을 불살랐던 것, 조도관이 민간에 흩어져 비축해둔 미, 포를 백성들에게 나눠주도록 지시했던 것도 그 연속선에 있는 조치였다.


또한 인조는 즉위 후 6개월 만에 민에게서 거둘 예정이었던 원곡 11만 수천 석을 삭감했다. 이 원곡은 진헌, 제향, 어공에 쓰일 예정이었는데, 광해군 13년 이전의 미납 공물이었다.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인조 말년 공식적인 공물가 원곡의 총량이 5만 석이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때 삭감된 양은 대단히 많은 것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급한 대로 이런 조치를 통해서나마 광해군대의 '일탈' 을 '정상화' 해야 했다.'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무슨 엄청난 대단한걸 해서 전후복구 했다는게 아니라 대충 광해군이 뜯어놓은거 적당히 다시 풀어주고,

 

더 뜯기로 예정되어 있던거 취소하고

 

이상한 돈 드는 사업 안하고 '휴양' 명목으로 

 

 

가만히만 있어도 광해군 시기보다는 나았다는 평가.

 

 

숙종 - 영조 - 정조 대로 이어지는 그래도 그나마 '조선 중후반기의 부흥' 이라고 불릴만한 기반의 경제사적, 여타 행정사적 흐름을 살펴보려면 인조 즈음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는데,

 

다른 엄청난 이유가 있는게 아니라 그냥 

임진왜란 나서 전국토가 파탄난 거 본격적인 휴지기를 가진게 

전쟁이 끝난지 무려 20년이 지난 저때부터 그나마 했기 때문.

 

 

전쟁은 물론이고 광해군 시기까지 합쳐진 파탄으로 피폐해진걸 

 

그나마 저때부터 쉬면서 조금씩이라도 다시 회복하기 시작함.

2004년 아틀라스 한국사

 

"왕이 된 광해군은 적극적으로 전후복구에 나섰다" 는 내용.

 

전형적인 레파토리인 "민생안전" "대동법 추진" 등이 보임.




(고려대학교) 한국사, 2014

 

그런 전형적인 레파토리 민생안전, 전후복구 특히 광해군이 대동법 추진 이런 부분 싹 사라지고 

외교 부분은 나름대로 평가 해주면서도

 

내정 파트에서 "즉위기간 내내 궁궐 공사 했다"  궁궐공사를 강조함.

 

예전보다 최근에 나온 개설서일수록 이런 부분이 좀 더 반영되는중

 

이런 재앙적인 궁궐공사를 어떻게든 쉴드치려고

왕권강화라는 명목으로 옹호하는 경우가 있지만

 

실제로 광해군이 왕위를 지키지 못해서 쫓겨난 군주라는게 여기선 가장 아이러니임.

 

결국 완전히 실패한 짓거리라는 소리니까...


이 궁궐 정신병에서 가장 웃기는건 

광해군이 실제로는 도성 내의 병사들까지 궁궐 공사하면서 계속 외부로 보내 실제 자신의 호위병 숫자 마저도 줄였다는 점임 

 

왕권 강화한다고 공사한다는데 

호위병까지 줄이면서 군사 외부에 밀어넣고 

결국 반정 당해서 쫒겨났다는게...

 

 

무슨 거창한 이유 대면서 합리화 할게 아니라 

 

진짜로 정신병, 

아니면 무슨 미신이라도 있었나 하는게 차라리 더 그럴듯하지 않나 싶은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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