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와 논란

충격적인 대만 최악의 군납 비리 실화 <인칭펑 대령 사망 사건>

누루하치 2023. 2. 10. 23:17

1980년 대만군은 중국의 개혁개방의 시작과 동시에 국제 사회에서의 외교적인 고립과  중국의 강력한 압박으로 인하여 기존에 유지되던 유럽의 무기도입 루트를 상실하게 되었고현재, 상당수의 무기 도입을 미국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문제는 그 단가가 성능에 비해 높게 책정되어 다운그레이드된  UH-60 블랙호크 헬기를 대당 한화 600억원에 달하는 금액을 지불하고  구매를 해야할 정도였죠 *비슷한 시기 대한민국은 대당 150억원을 지불


터무니없는 바가지가 씌인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속도로 증강 중인 중국군 때문에
 
대만군은 어쩔수 없이 장비들을 비싼가격을
감수하고 구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산장비를 개발하거나 기존의 장비들을
개량하는 선에서 국방력을 유지시키고 있죠
 


위 사진은 프랑스 해군의 라파예트급 호위함입니다.
 

세계 최초로 스텔스 설계를 도입한 전투함이며
획기적인 건조방식과 진보된 전투력으로
세계에 충격을 줬었던 함이었죠

대만해군은 중국의 압박이 있기 전인 90년대 초에
여섯 척을 구매하여 현재까지 운용 중입니다.
 
이번 글에서 다루게 될 사건들의 중심에는 
이 호위함이 자리잡고 있게 됩니다.
 

1980년 2월 14일


대만정부는 대략 십여년간 본토를 방어 할 수 있는
해군을 건설한다는 <광화 2호 계획> 을 통해
 
1,500톤급의 호위함 16척을 해외에서 도입하고자
구매 사업을 추진 중에 있었습니다.

대만은 해군함정 도입을 위하여 미국, 프랑스, 독일, 
대한민국 등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게 함정을 
팔아달라는 제안서를 보냈고
 

그중에서 대한민국의 울산급 호위함이 도입에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이유는 타국 함정에 비해 준수한 성능과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 때문이었죠
 
1988년
 

유력한 후보이자 계약 직전까지 갔었던 울산급이
대잠, 대공능력 등, 호위함으로서의 성능이 
부족하다는 문제점이 대두되고
 


대한민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맺게 되면서부터 
 
울산급의 도입은 완전히 백지화 
되고 말았습니다.
 
1989년
 


호위함 도입에 차질이 생겨서 난감해진 대만은
독일에게  베스트셀러 독일제 호위함인 
 
MEKO 200을 팔 수 없겠냐고 조심스레 
판매 제안을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독일은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더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호위함의 판매를
딱 잘라 거절해버렸습니다. 

이리하여 대만은 여러나라들로부터 연달아 
거절당한 끝에 남아있는 국가는 
 
외교관계 상관없이 자국의 무기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었던 프랑스 뿐이었습니다.

대만의 군 관계자들은 발 빠르게 프랑스 현지로
달려가서 라파예트급 호위함을 살펴보았고
 
잘빠진 디자인과 우수한 대잠능력, 그리고 우수한 
스텔스 성능을 가지고있는 라파예트급에게 
깊이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단 몇개월 만에 대만 측은 최종적으로
라파예트급을 도입하기로 결정하게 되었죠

그런데 문제는 역시 가격 이었는데 라파예트급 
여섯척을 구매하는데 프랑스가 제시한 
금액은 대략 70억 유로로
 
현재 환율로 따지면약 9조 5,000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금액이 최종계약 시기였던 2년 뒤인 
91년도 쯤에는 무려 160억 유로, 
 
현재 환율로 따지면20조 7800억원으로 
껑충 치솟기 시작하면서

1차로 여섯 척을 도입하고 네척을 추가로 구매하려던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대만은 눈물을 머금고 
 
기존의 계획보다도 훨씬 적은 숫자인 여섯척의 
라파예트급만을 최종적으로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만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이 프랑스에게 슬슬 압력을 
넣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죠
 

그 결과로 대만에게 판매된 라파예트급들은 
기존 계획과는 다르게 프랑스제 
 
무기 시스템이 탑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빈 깡통이나 다름없었으며

프랑스제 전자장비들이 탑재된 함정에 미국제 
무기들을 새롭게 탑재시키다 보니 
 
자잘한 오류나 고장 등의 애로사항이
무척이나 많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대만군의 라파예트급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뛰어난 스텔스 성능은 사실상 사라졌고
 
대공방어능력은 60년대 수준으로 급격히 
추락한 상태로 전락하고 맙니다.

기껏 비싼돈 주고 샀던 대만해군의 차기 주력함들은 
여러가지 문제점 때문에 가동률이 떨어져 
 
여섯대의 라파예트급들은 훈련은 커녕 기지에 
머물고 있는 날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1993년 12월 10일
 

<광화 2호 계획>
 을 추진해 왔던 군 관계자들 중
한명이었던 해군사령부 조달본부 소속의
 
집행장 인칭펑 대령 이 실종된지 하루만에 대만 
타이베이 시 남쪽 쑤아오 해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고아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해군장교가 되어
40대 초반에 대령계급을 달 정도로 
 
출세가도를 달리던 유능한 그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을 때 가족과 지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됩니다.

현지 경찰들은 인칭펑 대령의 사망을 사고사로 
처리하려고 했지만 대령의 아내였던  
 
리메이쿠이 가 이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하며
항의하기 시작하자 아내의 요청에 따라 
경찰은 부검을 실시하게 되었고 

부검과정에서 충격적이게도 타살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즉, 인칭펑 대령은 누군가에게 살해된 후
바다에 버려졌다는 거였죠
 


문제는 그가 살해된 원인에 대해서였는데 
대령의 아내가 경찰과 언론 앞에서
 
자신의 남편은 몇달전부터 군내부에서 벌어진 
비리사건에 대해 고발하려다 살해됐다고

주장하면서 인칭펑 대령의 사망사건은
대만에서도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실제로도 익명을 요구하는 군 내부 고위 관계자가
대령의 사망사건을 취재하는 기자에게
 
 " 인칭펑 대령은 차세대 호위함 도입사업 당시에 "
발생했던 비리사건에 대해 고발하기 위한 
 자료를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라고 고백 하면서부터 논란은 더더욱 커지게 되었고 
군부와 정계의 분위기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위와 같이 대령의 사망사건은 사실상 군내부의
비리문제를 고발하려다 억울하게 입막음
당한 케이스로 비춰지고 있었고

대만 검찰과 헌병사령부를 중심으로 한 
수사팀이 꾸려져 본격적으로 
 
인칭펑 대령의 사망 사건을 수사하여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는 듯 했으나
 
군내부에서의 압력과 알수 없는 외부세력들의 개입
때문에 사실상 수사팀은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검찰 측은 대령의 사망 사건을 개인의 원한으로
인하여 살인이 발생한 것으로 보고 
 
대령의 사망 사건을 미제사건으로 몰고 가벼리면서 
수사를 완전히 종결시켜 버리고 말았죠

인칭펑 대령의 사망사건이 이런 식으로 흐지부지

허무하게 종결되어 버리자 그의 아내는 
 
정신적 충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자살시도 등의
극단적인 시도를 하며 망가지기 시작했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해군장교가 되고자 했었던
젊고 유망했던 두 아들은 조국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와 좌절에 늪에 빠져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대령의 가족들은 그의 억울한 죽음을
외면하지 말아달라며 끊임없이 국가에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6년 후
2000년

지금까지 대만의 정권을 장악했었던 국민당이
총통선거에서 패배하여 민주진보당 소속의
 
<천수이볜> 이 새로운 대만 총통이 됨으로써
새로운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대만 최초의 민주당 소속의 총통 천수이볜은
인칭펑 대령의 유족들이 보내온 탄원을 
 
받아들여 다시 한번 제대로 된 사건 수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명령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언론이 중심이 된 여론의 재수사 
요구에 대한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재수사 하도록 한거였죠

인칭펑 대령의 사 망사건을 재수사 하기위해서
대만정부는 검사와 헌병들로 구성된 수사팀
 
<1209호 특별수사팀> 을 창설하여 다시 한번
사건의 전말을 파해치기 시작합니다.

수사팀의 주 목적은 인칭펑 대령이 고발하려고
했었던 군비리에 관해서 자세한 전말을 
모조리 밝혀내는 것 이었죠.
 
2000년 8월
 

" 대령님은 자신이 살해될 것을 알고계셨습니다 "
 
이 발언을 한 것은 <왕완잉> 이라는 예비역 
해군 대위로 현역시절에는 인칭펑 대령의 
부관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새로 교체된 정권이 적극적으로 대령과
관련된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하자
 
그동안 꽁꽁 숨겨 왔었던 중요한 증거물들을 
수면위로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비밀 녹취장치로 인칭펑 대령이
라파예트급 도입을 추진하려고 했었던 
80년대 말,

프랑스와 대만 군관계자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줬었던 로비스트들의 사무실에 설치했던
물건들인 것으로 밝혀졌으며 

특별수사팀 또한 대령과 연관된 사람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녹취장치들을 
발견하기는 했었으나 

정작 중요한 장치 내부의 녹음테이프들이 
사라져 무기브로커들이 무슨말을 
 
누구와 주고받았는지 전혀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알고보니 이 녹음 테이프들은 인칭펑 대령이
군내부에서 가장 신뢰하고 믿을만한 
 
인물이던 자신의 부관 왕완잉 대위에게 
전달해 줬던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이유는 이미 군내부에서 무기도입 비리에 
대한 증거를 수집중인 자신을 
 
음해하려는 움직임을 대령이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동안 수집했던 
증거자료들도 모두 사라질테니 그로써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던 겁니다.
 
" 자네만 믿겠네 대위 "
 
인칭펑 대령은 1993년 12월 8일에 녹음테이프를
왕완잉 대위에게 비밀리에 전달했으며 
 
왕완잉 대위는 자신의 상관이 며칠 후 시체로 
발견되자 해당 테이프들을  수사팀에게 
전달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믿지 못했고 증거 인멸의 우려가
무척이나 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대위는 증거물들을 꼭꼭 숨겨놓음으로써 
언젠가 대령의 죽음과 비리를 제대로 
 
파해칠 수 있는 절호의 시기가 오기를 기약하며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긴 기다림 끝에 녹음테이프는 세상 밖으로
그 존재를 알릴수 있게되었고 왕완잉은 
 
테이프의 존재를 수사팀과 언론에게 알린 후 
과거 인칭펑 대령이 신뢰해 왔었던
 

인물이자 대령의 직속상관 이었던 리쿤차이 소장
에게 녹음테이프를 전달해주었으며 
 
테이프를 전달 받은 리쿤차이 소장은 테이프를 
전달받은 당일날 무장한 헌병들을 
호위로 대동한 채 

곧바로  <1209호 특별수사팀> 의 대장이었던 우룽장 
군 검찰관에게로 넘겨주게 됩니다.
 
2000년 12월 31일
드디어 특별수사팀이 논란의 대상이 되엇던 
문제의 녹음테이프를 공개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테이프 속 내용물은 깨끗하게 
지워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왕완잉 대위의 오랜 기다림과 염원, 비리를 
파해치고 대령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줄 수 있을거라고 여겼었던 유족들의 기대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몇주 뒤 리쿤차이 소장은 불명예 전역을
당하고 군에서 쫒겨나게 되었으며

왕완잉 대위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었으며 
그의 집은 원인불명의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1209호 특별수사팀>
 은 녹음테이프 훼손 사건과
지금까지 조사해왔던 자료들을 바탕으로
 
라파예트급의 도입 실무 총책이었던 대령이
무기브로커와 군 고위관계자들 사이에 
 
발생했던 부정행위를 폭로하려다 살해된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비리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라파예트급 여섯척을 구매하는데 사용 되었던
 
160억 유로 중에서 무려 35억 유로가 당시 대만군 
고위 관계자들에게 뇌물로 사용되었으며 

이 중에서 11억 유로가 또 다시 대만의 정·관계 
인사들에게 넘어갔으며 일부는 프랑스로 
건너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80년대 말, 라파예트급 여섯 척의 구매금액이 불과
70억 유로에서 160억 유로로 훌쩍 오른 것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였습니다.
2007년

특별수사팀은 우여곡절 끝에 전·현직 군장성들
6명을 비리혐의로 체포하는 등의 활약을 
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범죄와 혐의를 입증할만한 증거를 
찾지 못해 수사 진행은 더디기만 했고

녹음테이프 훼손 사건으로 인하여 수사팀 멤버들
간에 서로를 불신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비리의 관한 수사는 사실상 불가능 한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2010년

대만 법원은 특별수사팀이 체포한 6명의 군 관계자들에 
대하여 비리혐의를 입증할 만한 어떠한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전원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1209호 특별수사팀> 은 해체되고
라파예트급 도입과 관련된 비리는 
끝내 밝혀지지 못했으며 
 
인칭펑 대령을 살해한 범인 또한 영원히 
밝혀내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 제이름은 인칭펑 입니다 "

" 중화민국 해군사령부 조달본부 소속 대령이며 "

" 저는 제가 사랑하는 조국을 위하여 군내부에서 "
발생한 비리들을 고발하려고 합니다

" 내부고발자의 최후가 어떨지는 이미 예상하고 "
있으며 그 또한 덤덤히 받아들이려 합니다

" 제가 한 행동으로 인하여 앞으로 이 땅의 바다를 "
수호해 나갈 후대의 젊은이들이 
 
 


" 좀더 청렴하고 바른 뜻을 품은 채 국가와 "
국민을 수호하고 봉사할 수만 있다면
 
 " 이 목숨, 기꺼히 조국을 위해 내놓겠습니다 "


 "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에겐 정말 "
미안하고 또 미안하지만 
" 누군가는 반드시 이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
것은 변함 없는 사실입니다 

 " 한 평생을 조국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


" 어떠한 후회나 두려움은 없습니다 "
 
 

- 1993. 03. 22 -

전에 누가 저 사건에 대해서 이런 의견을 내더라고요

1. 어느 나라든 비리는 있을 수 있다. 그러니 대만 만의 특이한 일은 아니다.
2.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그런 비리가 탄로나는 건, 그 나라 사법체계가 우수하거나, 구성원들의 정의감이 우월해서가 아니다
3. 바로 군대 내부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입장 차이가 있는 집단이 수혜자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4. 군대라는 거대한 조직 내에서, 입장 차이를 가진 파벌은 존재할 수 밖에 없고, 그들의 상호 견제가 이런 비리로 혜택을 보는 것을 막는 것이다
5. 그런 점에서 이 사건은 특이하다. 엄청난 비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노출시킨 세력이 없다는 점에서.
6.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이건, 군부 전체의 모든 파벌이 다 수혜 대상이었고, 그래서 모두가 다 견제하지 않고 감춘 사건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후덜덜한 해석이더라고요. 한 개인을 국가의 군대 전체가 다 묻어버린 사건일수도 있다니… 얘네들, 정말로 중국이랑 전쟁나면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나?

 

반응형